나는 여느 또래 친구들처럼 대학입시를 위해 잠을 쫓아가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평범한 청소년입니다.

이런 나의 평범한 학교생활 중에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전 친한 친구들로부터 1년 넘게 당했던 학교폭력. 친한 친구들이었기에 나는 참고 참았지만 결국 상처는 곪아 터져버렸습니다.

그 사건 이후 나는 부모님과 함께 지난날의 내 자신을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고 그동안 조금은 이기적이고 남을 배려하지 못했던 내 부족함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형식적인 시간 때우기식 봉사활동이 아닌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하며 진정성 있게 그들을 돕고 배려하는 봉사활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리라 다짐하며 자아성찰의 시간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엄마와 함께 몸과 마음은 불편하지만 마음만은 정상인보다 더 따뜻한 중증장애인인 삼촌, 이모들이 검정고시합격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야학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목요일 5시. 매주 참여하지는 못하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는 평일이나 방학, 특히 봄방학 때 영어학습도우미로 삼촌들과 이모들을 만나러 야학교에 가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고 설렙니다.

내가 수업을 하러 야학교에 가면 삼촌, 이모들이 많이 좋아하시고 예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몇몇 분들은 심한 장애를 가지고 계셔서 말을 잘 못 알아듣기도 하지만 그분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내 얼굴에 미소가 번집니다.

50분 수업동안 나와 엄마가 번갈아 가며 수업을 진행하면서 칠판에 적힌 내용을 노트에 적어드리거나 잘 모르는 단어나 내용을 설명해드리는데 사실 알파벳도 잘 알지 못하고 쓰기조차 어려워하시는 그분들에게는 학습내용이 너무 어렵다는 걸 매번 느낍니다.

중등검정고시 영어수업교재와 초등영어 1단계교재를 번갈아가며 가르치는데 초등영어 1단계는 그나마 간단한 생활회화나 그림을 보고 단어를 이해하는 정도여서 괜찮지만 중등검정고시 영어교재는 실제 중학교 수준 이상의 영어이기 때문에 그분들에게는 많이 버거운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올해에 꼭 그분들이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영어단어장이나 영어교재를 만들고 싶다는 꿈이 생겼습니다.

교재를 만들어서 장애인야학교 학생분 들에게 선물하고 그들의 검정고시합격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뜻 깊은 중증장애인 야학교 봉사활동을 하면서 난 또 다른 멋진 인연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 근무하시는 선생님이 나에게 동생 한 명을 소개시켜 주고 싶다고 하셨는데 같이 이야기하고 놀 수 있는 형을 간절히 원하는 자폐아 동생이었습니다.

사실 자폐아를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만나기 전에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지 어떻게 놀아주어야 하는지 걱정이 앞섰지만 그 동생의 친한 말벗이 되어주고 나 또한 그 친구를 통해 무언가 배우고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기꺼이 형이 되어주기로 하고 봉사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정훈이를 만났을 때 이해할 수 없는 말과 계속되는 반복적인 질문을 하고 나와 눈도 마주치치 않아서 많이 당황했습니다.
내가 이 친구한테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지, 어떤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정훈이와의 처음 만났던 날의 나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정훈이와의 다정한 산책을 꿈꾸고 계획하며 만났던 그 날, 럭비공 쫓듯 정훈이 뒤만 열심히 쫓아다녔던 나를 말입니다.

그 후 나는 열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자폐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훈이를 만나기 전 날 무엇을 할지 항상 고민하고 생각하는 게 나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정훈이와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대화하는 방법도 나름 터득했습니다.

잠시, 내 동생 정훈이를 칭찬하자면 글씨도 나보다 더 잘 쓰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면 그대로 따라 말하지만 둘 중 선택형으로 질문을 하면 곧잘 자신의 의사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정훈이는 항상 웃으며 ‘네’라고만 대답하는 긍정적인 아이입니다.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정훈이가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달력에 30(숫자) 있어? 달력에 50(숫자) 있어?” “먹어? 안먹어?” 입니다.

만날 때마다 반복되는 질문에 대답해 주는 게 때로는 귀찮기도 하지만 내가 대답하지 않고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 금세 시무룩해지는 정훈이의 표정에 열심히 대답해주게 됩니다.
정훈이를 통해 이해심과 인내심을 배우게 됩니다.

정훈이는, 사진 보는 걸 좋아해서 틈만 나면 내 휴대폰 사진폴더를 열어보기도 합니다. 또 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도 좋아합니다.

물론 짧은 시간이지만 말입니다.

정훈이는 항상 라면봉지를 가지고 다니는데 그 안에는 정훈이만의 특별한 보물이 들어있습니다.

정훈이 어머니가 그 보물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첫 날 나를 만나자마자 보물을 보여주는 모습을 보고 정훈이에게 내가 특별한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실 그 보물상자에는 글씨가 쓰여진 종이조각들과 전선줄만이 가득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하찮은 전선줄로 보이지만 정훈이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하고 특별한 물건인 것입니다.

또 다른 봉사활동으로 주말이나 방학 때 기회가 생길 때마다 요양병원과 대학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는데 최근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올해 요양병원 봉사활동 중 참여했던 문화공연으로 할머니, 할아버지께 피아노 연주를 해 드린 일입니다.

매년 가족과 함께 요양병원에 계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데 올해는 용기를 내어 피아노연주를 선보였습니다.

워낙 피아노를 연주하는 걸 좋아해서 학교에서도 음악시간과 쉬는시간에 친구들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곧잘 피아노를 쳐서 친구들에게 스트레스 사냥꾼으로 불리고 있고 작년 학교축제 때는 직접 곡을 편곡해서 친구와 피아노 연탄곡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요양병원 할머니, 할아버지께 드릴 향냥 주머니를 만들어 우리가족과 자매 결연을 맺은 할머니 3분께 선물해 드리고 식사와 청소를 도와 드린 후 그 분들을 모시고 병원에 마련되어 있는 강당에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 연주하였습니다.

사실 연습을 하지 못해서 많이 틀리기도 했지만 박수를 많이 쳐 주셔서 감사하고 뿌듯했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 할머니를 모시고 다시 병실로 들어가 어깨도 주물러드리고 휠체어에 태워 산책도 시켜드리며 다음에 또 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낍니다.

장애로 인해 몸이 힘들고 속도도 더디지만 그 분들이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장애가 없는 내가 오히려 더 작아지고 부끄러워집니다.

 
사소한 일에도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짜증을 부리며 내가 누리는 모든 것들이 당연한 거라 여겼던 내 자신을 돌아보며 이제는 사소한 일에도 만족해하고 행복해하며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져봅니다.

사실 장애인야학교 수업을 하다보면 그 분들의 어려움을 종종 듣습니다.
그분들은 공부하는 어려움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어려움을 많이 겪습니다. 어떤 분들은 계단을 내려오다가 굴러 떨어져 뼈에 금이 가 수술을 받아야 해서 수업을 받으러 오지 못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아직도 장애인을 위한 편의 시설이 많이 부족한 게 현실입니다. 장애인이 편하게 생활할 수 있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또 요양병원 봉사활동을 통해서도 많은 것들을 느끼게 됩니다.
몸이 불편한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산책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많이 외로우셨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텔레비전 채널 바꾸어드리는 것 하나에도 고마워하시고 대답해주는 것 하나에도 고마워하시며 간식까지 챙겨주시는 그 분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또 요양사 아주머니들이 점심식사 때나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할머니들을 보살필 때 손이 많이 모자라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정부에서 요양사에 대한 처우방법을 개선하고 그들에게  예산을 조금 더 투자하면 노인복지에도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요양병원에서의 봉사활동도 의미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나에게 가장 뜻 깊은 봉사활동은 정훈이와의 봉사활동입니다.

사실 정훈이와 봉사활동을 하면서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미안함이 남아있습니다.

무언가 가르쳐야 할 것 같고 무언가 결과가 눈에 보이는 활동을 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 자폐에 관련된 정보를 얻으려 애썼고 자폐관련 도서도 읽으며 정훈이를 이해하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또 정훈이가 다니는 언어치료센터 원장님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훈이에게는 틀에 짜여진 학습보다는 지금처럼 같이 놀아주고 이야기해주고 체험해주는, 정훈이 눈높이의 체험중심 친교 활동이 제일 좋은 학습이라는 조언을 들었고 무언가 가르쳐야하고 무언가 눈에 보이는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조금은 떨칠 수 있었습니다.

정훈이를 만난지도 벌써 1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처음에 엄마가 정훈이 어머니도 쉬셔야 한다며 우리집으로 한 번 데려오자는 제안으로 우리집에 온 적이 있었는데 지금 정훈이는 우리집에 오는 걸 제일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한테나 보여주지 않는 자신의 보물을 서슴없이 보여주며 우리집 아파트 앞에 도착하면 나보다도 먼저 우리 집을 찾아가 문을 열고 무슨 말에도 환하게 잘 웃어주는 정훈이가 이제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정훈이는 지금도 칭찬받는 걸 좋아하고 등을 쓰다듬어주는 것도 좋아하며 쳐다보고 웃어주기만 해도 좋아합니다.

정훈이의 이해 하기 힘든 질문에 계속 답해주는 게 지금도 조금은 힘들지만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관심 가져주는 걸 좋아하는 그런 순수한 모습이 나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또 하찮은 것에 욕심부리는 것 조차 미안해지고 겸손해집니다.

정훈이와의 관계가 더 돈독해지면서 정훈이의 삶과 생활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습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미소를 지어주며 작은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친절하고 진정성있게 대해야 한다는 나만의 삶의 자세도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장애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고 가치관 또한 더 뚜렷해졌습니다. 그리고 나를 건강하게 나아주신 부모님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한없이 가득합니다.

정훈이를 만나면서 나의 진로가 조금은 확실해졌습니다. 자폐와 장애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뇌질환과 신경계통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졌고 뇌신경재활학 분야를 연구해서 자폐와 장애에 대해 아직 해결되지 못한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내어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어졌습니다.

예전에 정훈이 어머니가 나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엄마로서 죽기 전 소원이 하나 있는데 정훈이가 나중에 착한 사장님을 만나서 제 때 월급 받고 인간으로서 존중받으며 행복하게 사는 걸 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정훈이의 착한 사장님이 되려고 합니다. 정훈이처럼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는 취약계층의 사람들을 일정 수 직원으로 고용해서 그들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그 노력의 결과를 사회에 공헌하는 사회적기업의 착한 사장님말입니다.

"정훈아! 나를 변화시켜줘서 고마워. 그리고 우리 우정 오래오래 변치말자."

<청소년자원봉사(DOV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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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볼(Dovol)은 “Do Volunteer”(자원봉사 하다)의 약자입니다.

[문의] 참여봉사부 02-330-2870